JUNI COLOR TEST 오늘, 조금 더 나를 알아가는 시간

빨강은 왜 '멈춤'이면서 '사랑'일까

횡단보도 앞에 섰습니다.
빨간불이 켜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발을 멈춥니다.

길 건너편에는 꽃집이 있습니다.
유리문에 빨간 하트가 붙어 있습니다.
그 하트는 멈추라고 하지 않습니다.
들어오라고, 마음을 전하라고 합니다.

같은 빨강입니다.
그런데 하나는 멈추라 하고, 하나는 다가오라 합니다.

신호등에 멈춘 사람들빨강이 품은 뜻을 꼽아 보면 서로 어긋나는 것이 많습니다.

위험, 금지, 경고.
사랑, 열정, 축하.
소방차도 빨갛고, 장미도 빨갛습니다.
'적자'의 장부도 빨갛고, 잔칫날의 봉투도 빨갛습니다.

뿌리를 따라가 보면 두 가지가 나옵니다.
피와 불입니다.

피는 다치면 흐릅니다.
그래서 빨강은 위험이 됩니다.
피는 살아 있는 몸 안에서 뜨겁게 돕니다.
그래서 빨강은 생명이 되고 사랑이 됩니다.

불도 그렇습니다.
가까이 가면 데이고, 멀리 있으면 따뜻합니다.
빨강은 처음부터 두 얼굴을 가지고 있었던 셈입니다.

사람이 가장 먼저 손에 쥔 색도 빨강이었습니다.
아주 오래전 사람들은 붉은 흙을 갈아 동굴 벽에 그림을 그리고, 몸에 바르고, 죽은 이의 곁에 뿌렸습니다.
흙에서 얻기 쉬운 색이기도 했지만, 피를 닮은 색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빨강은 그때부터 사람의 삶과 죽음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1868년 12월, 영국 런던 국회의사당 앞에 세계 최초의 신호등이 섰습니다.
철도 신호를 다루던 기술자 존 피크 나이트가 만든 것이었습니다.
낮에는 기차 신호기처럼 팔을 들고 내렸고, 밤에는 가스등으로 빨강과 초록을 비췄습니다.
빨강은 멈춤, 초록은 주의하며 진행.
기찻길에서 쓰던 약속을 그대로 길 위로 옮겨 온 것입니다.

기찻길에서 빨강이 멈춤이 된 데에도 까닭이 있었을 겁니다.
멀리서도, 어둠 속에서도 먼저 눈에 들어오는 색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미 빨강을 보면 피를 떠올리고, 위험을 떠올렸습니다.
멈추라는 말에 이만큼 어울리는 색은 없었습니다.

이 신호등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한 달쯤 뒤 가스가 새어 터졌고, 곁을 지키던 경찰관이 다쳤습니다.
신호등은 사라졌지만 '빨강은 멈춤'이라는 약속은 남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횡단보도 앞에서 멈추는 것도 그 약속 덕분입니다.

1868년 런던 국회의사당 앞, 가스등 신호기 옆에 선 경찰관이 약속은 길 밖으로도 번졌습니다.

1966년 월드컵에서 한 심판이 선수를 퇴장시키려다 말이 통하지 않아 경기장이 한참 소란스러웠습니다.
그 대회 심판들을 이끌던 영국인 켄 애스턴은 집으로 가던 길, 신호등 앞에 차를 세웠습니다.
노란불에 조심하고, 빨간불에 멈춘다.
그렇게 생겨난 것이 노란 카드와 빨간 카드입니다.
1970년 월드컵부터 쓰였고, 이제는 말이 달라도 빨간 카드 한 장이면 누구나 알아듣습니다.

자리를 바꾸면 빨강은 전혀 다른 말을 합니다.

중국에서 빨강은 복의 색입니다.
설날에는 빨간 봉투에 세뱃돈을 넣고, 결혼식에는 신부가 붉은 옷을 입습니다.
그곳에서 빨강은 멈추라는 말이 아니라 잘되라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도 빨강은 지키는 색이었습니다.
동짓날이면 붉은 팥죽을 쑤었습니다.
먹기 전에 대문과 담장에 한 숟갈씩 뿌렸습니다.
붉은빛이 나쁜 기운을 쫓는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할머니의 동짓팥죽그런데 같은 땅에서 빨강은 꺼리는 색이기도 합니다.

빨간 펜으로 사람 이름을 쓰면 안 된다는 말, 어릴 때 한 번쯤 들어 보셨을 겁니다.
죽은 사람의 이름을 붉게 적던 데서 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나쁜 것을 막아 주던 색이, 이름 앞에서는 불길한 색이 됩니다.

빨강은 하나인데, 뜻은 놓인 자리마다 달라집니다.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는 기호를 두 쪽으로 나눴습니다.
눈과 귀에 닿는 겉모습을 '기표', 그것이 가리키는 뜻을 '기의'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둘 사이에 처음부터 정해진 끈은 없다고 했습니다.
같은 동물을 우리는 '개'라 부르고, 영어로는 ‘dog’라 부릅니다.
소리가 달라도 뜻은 하나입니다.
어느 소리가 더 개다운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약속하고, 그 약속이 쌓여 뜻이 된다는 것입니다.

소쉬르는 말을 두고 한 이야기였지만, 색에도 그대로 들어맞습니다.
빨강이라는 기표는 하나입니다.
신호등 위에서는 '멈춤'이, 하트 위에서는 '사랑'이, 팥죽 위에서는 '지킴'이 그 자리에 붙습니다.
색은 뜻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습니다.
놓인 자리가 뜻을 정합니다.

파란불에 길을 건너는 사람들

다시 횡단보도 앞입니다.
초록불로 바뀌고, 사람들이 걷기 시작합니다.
건너편 꽃집의 하트는 여전히 빨갛습니다.

오늘 하루, 몇 번의 빨강을 지나치게 될까요.
그 빨강들은 저마다 무슨 말을 하고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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