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면 파란 아이콘이 유난히 많습니다.
은행 앱, 카드사 앱, 메신저, 사진첩.
마치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비슷한 파랑이 줄지어 있습니다.
돈을 맡기는 곳, 개인 정보를 다루는 곳일수록 파랑을 고르는 일이 많습니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은행과 카드 회사, 컴퓨터 회사의 로고에도 파랑이 자주 보입니다.
왜 하필 파랑일까요.
파랑은 하늘과 바다의 색입니다.
하늘은 날마다 머리 위에 있고, 바다는 늘 그 자리에서 출렁입니다.
가까이 다가가면 사라지고, 멀리서 볼 때만 파랗게 보이는 색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파랑에는 차분함, 거리, 변하지 않음 같은 느낌이 함께 따라옵니다.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색을 물으면 파랑이 첫손에 꼽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2015년 한 여론조사 기관이 네 대륙 열 개 나라에서 조사했을 때, 모든 나라에서 가장 많이 고른 색이 파랑이었습니다.
누구에게나 무난하게 받아들여지는 색이라는 뜻입니다.
많은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회사에게 이만큼 안전한 선택은 드뭅니다.
그렇다고 파랑이 늘 사랑받은 것은 아닙니다.
6화에서 만난 색채 역사학자 미셸 파스투로에 따르면, 고대 로마에서 파랑은 그다지 대접받지 못한 색이었습니다.
파랑의 자리가 높아진 것은 중세 무렵, 성모 마리아의 옷이 파랗게 그려지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파랑에서 느끼는 고요함과 믿음도, 오랜 세월에 걸쳐 조금씩 쌓인 것입니다.
파랑이 '믿음'을 맡게 된 데에는 제복의 역할도 컸습니다.
1829년, 영국 런던에 근대적인 경찰이 처음 만들어졌습니다.
경찰을 만든 로버트 필은 경찰관에게 짙은 파란색 제복을 입혔습니다.
당시 영국 군인의 붉은 군복과 뚜렷하게 구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시민을 다스리는 군대가 아니라, 시민 곁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을 색으로 보여 주려 한 것입니다.
그 뒤로 세계 여러 나라의 경찰과 해군, 그리고 은행원과 회사원의 정장이 짙은 남색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짙은 파랑은 차츰 '맡겨도 되는 사람', '규칙을 지키는 사람'의 옷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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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3화에서 만난 미국의 철학자 찰스 샌더스 퍼스를 다시 떠올려 볼 만합니다.
퍼스는 기호를 도상, 지표, 상징으로 나눈 사람입니다.
그는 또 기호가 뜻을 갖는 데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기호 그 자체, 기호가 가리키는 대상,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의 마음속에 생기는 뜻입니다.
퍼스는 이 세 번째를 '해석체'라고 불렀습니다.
은행 로고의 파랑이 '믿을 만하다'로 읽히는 것은 파랑 안에 믿음이 들어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늘과 바다를 보며 자라고, 파란 제복과 파란 정장을 보며 살아온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런 해석체가 쌓였기 때문입니다.
기업은 그렇게 이미 쌓여 있는 뜻을 빌려 와 로고에 입힙니다.
그런데 모두가 파랑을 고르면 어떻게 될까요.
은행 앱이 모두 파란색이면, 손님은 어느 것이 어느 은행인지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믿음을 얻는 대신, 내 얼굴을 잃게 되는 셈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다른 색을 고르는 회사들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은행만 보아도 파랑을 쓰는 곳이 있는가 하면, 노랑을 쓰는 곳도 있고 초록을 쓰는 곳도 있습니다.
메신저와 포털 가운데에도 노랑이나 초록을 얼굴로 삼아 이름을 알린 회사들이 있습니다.
4화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색은 다른 색과 달라야 비로소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브랜드의 색은 이렇게 두 가지 사이에서 줄타기를 합니다.
사람들이 이미 좋게 읽는 색을 빌려 올 것인가, 아니면 남들과 다른 색으로 내 얼굴을 만들 것인가.
믿음을 빌리려면 비슷해져야 하고, 기억되려면 달라져야 합니다.
다음에 은행 앱을 열 때 아이콘의 색을 한번 눈여겨보면 좋겠습니다.
그 색 하나에도 하늘과 바다, 런던의 경찰 제복, 그리고 남들과 달라지고 싶은 마음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