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I COLOR TEST 오늘, 조금 더 나를 알아가는 시간

색도 주인이 있을까

1995년, 미국 대법원에 색 하나를 두고 다툰 사건이 올라왔습니다.
세탁소에서 쓰는 다리미판 덮개의 초록빛이 도는 금색이었습니다.
한 회사가 오랫동안 써 온 그 색을, 다른 회사가 비슷하게 따라 쓴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물음은 간단했습니다.
색 하나만으로 상표가 될 수 있는가.
그리고 대법원은 '될 수 있다'고 답했습니다.

색에도 주인이 생길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법정 책상 위에 놓인 색 견본 카드 한 장과 판사의 망치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름과 그림으로 물건을 구별했습니다.

상표는 '이 물건은 우리가 만들었다'는 표시입니다.
그런데 색은 조금 다릅니다.
빨강은 누구의 것도 아니고, 하늘의 파랑은 모두의 것입니다.
그런 색을 한 회사가 혼자 쓰겠다고 하면 어딘가 이상하게 들립니다.

그래서 법은 조건을 달았습니다.
색이 처음부터 상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 색을 보는 순간 물건보다 회사를 먼저 떠올릴 만큼, 오랫동안 꾸준히 써 왔어야 합니다.
법에서는 이것을 '이차적 의미'라고 부릅니다.
색이 원래 가진 뜻 위에, 한 회사의 이름이 두 번째 뜻으로 얹혔다는 말입니다.
2화에서 이야기한 바르트의 '함축'과도 닮았습니다.
다만 함축은 사회 전체가 함께 만드는 뜻이고, 이차적 의미는 한 회사가 오랜 시간을 들여 일부러 쌓아 올린 뜻이라는 점이 다릅니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색 하나가 상표로 인정받은 것은 1985년, 건물에 넣는 분홍색 단열재였습니다.
단열재는 보통 누런 색인데, 이 회사는 오랫동안 분홍으로 물들여 팔았습니다.
분홍 단열재라고 하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 회사를 떠올렸습니다.

공사 중인 집의 벽 속에 분홍색 단열재가 가지런히 채워져 있는 모습

더 익숙한 예도 많습니다.
보석 상자 하나만 보고도 어느 가게의 것인지 아는 연한 청록빛 상자가 있습니다.
그 가게는 이 색을 상표로 등록해 두었고, 상자 색만으로 선물의 무게를 전합니다.
밑창이 새빨간 구두를 두고는, 그 빨강을 누가 쓸 수 있는지를 놓고 여러 나라 법원에서 다툼이 이어졌습니다.
미국의 한 택배 회사는 트럭과 유니폼의 짙은 갈색을 오랫동안 고집했고, 그 갈색을 자기 얼굴로 지켜 왔습니다.
멋을 내기 좋은 색도 아니고 눈에 확 띄는 색도 아니지만, 오래 쓰다 보니 갈색 트럭은 곧 그 회사가 되었습니다.

모두가 이기는 것은 아닙니다.
영국의 한 초콜릿 회사는 포장지의 짙은 보라를 오랫동안 써 왔고, 이 보라를 상표로 지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2013년 영국 법원은 그 등록이 너무 넓고 애매하다며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3화에서 왕의 색이었던 보라가, 이번에는 법정에서 주인을 찾지 못한 셈입니다.

우리나라도 2007년 상표법이 바뀌면서 색 하나만으로 된 상표를 출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만 인정받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 색이 곧 그 회사라는 것을 많은 사람이 안다는 사실을 보여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시 1화의 소쉬르를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처음부터 정해진 끈이 없고, 사람들의 약속이 그 끈을 만든다고 했습니다.
색 상표는 이 말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청록빛과 보석 가게 사이에는 처음에 아무 끈도 없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 같은 상자를 건네고, 사람들이 그 상자를 받아 들면서 끈이 생겼습니다.
법은 그렇게 생긴 끈에 이름표를 붙여 줄 뿐입니다.

법이 색 상표를 조심스럽게 다루는 데에는 또 다른 까닭도 있습니다.
세상의 색은 많아 보여도, 사람이 쉽게 구별하는 색은 생각보다 적습니다.
몇몇 회사가 좋은 색을 하나씩 가져가 버리면, 다른 회사가 쓸 색이 금세 바닥날 수 있습니다.
또 5화의 비상구 초록이나 구명조끼의 주황처럼, 쓰임새 때문에 필요한 색은 누구도 혼자 가질 수 없습니다.
모두의 안전을 위한 색이기 때문입니다.

커다란 색상표 앞에서 여러 사람이 각자 색 견본 한 장씩을 들고 서 있는 모습그러니 색에 주인이 생긴다는 것은, 색을 산다는 뜻이 아닙니다.

한 회사가 오랜 시간을 들여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자기 색을 심어 두었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상점 진열대 앞에서 글자를 읽기도 전에 손이 먼저 가는 색이 있다면, 그 색에는 이미 주인이 있는 셈입니다.
그 주인을 정한 것은 법보다 먼저, 그 색을 기억해 온 우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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