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I COLOR TEST 오늘, 조금 더 나를 알아가는 시간

보라는 어떻게 왕의 색이 되었을까

보라색은 흔히 고귀함과 신비로움의 색이라고 합니다.
왕의 옷, 성직자의 옷, 고급 화장품의 상자에서 보라를 자주 만납니다.

그런데 지금은 문구점에 가면 보라색 볼펜이 한 자루에 천 원입니다.
아이들 운동화에도, 휴대폰 케이스에도 보라가 흔합니다.

한때는 왕만 입을 수 있던 색이 어떻게 이렇게 흔해졌을까요.
그리고 흔해진 뒤에도 왜 여전히 고귀한 색으로 남아 있을까요.

보라색 망토를 두른 옛 황제와 문구점 진열대의 보라색 볼펜들

이야기는 지중해의 작은 바다 고둥에서 시작합니다.
지금의 레바논 땅에 있던 도시 티레의 사람들은 뿔고둥의 몸에서 나오는 분비물로 천을 물들였습니다.
햇빛을 받으면 짙은 자줏빛으로 변하는 염료였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티리언 퍼플', 티레의 보라라고 불렀습니다.

문제는 양이었습니다.
고둥 한 마리에서 나오는 염료는 아주 조금입니다.
1그램 남짓한 염료를 얻으려면 만 마리가 넘는 고둥이 필요했다고 전해집니다.
고둥을 잡고, 깨고, 오래 끓이는 일은 냄새도 지독했습니다.
보라색 옷 한 벌은 그만큼 많은 손과 시간, 그리고 돈이 들어간 옷이었습니다.

지중해 바닷가 작업장에서 사람들이 고둥 더미를 깨고 큰 솥에 끓이는 모습

값이 비싼 색은 곧 힘을 가진 사람들의 색이 되었습니다.
로마에서는 황제만 온전한 보라색 옷을 입을 수 있도록 법으로 정한 때도 있었습니다.
비잔틴 제국에서는 황제의 자식을 '자줏빛 방에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보라는 곧 왕의 자리였습니다.

동쪽에서도 보라는 높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고려 광종은 960년에 벼슬아치의 옷 색깔을 정하면서 가장 높은 품계에 자줏빛 옷을 입게 했습니다.
일본에서도 오랫동안 보라는 가장 높은 관리만 쓸 수 있는 색이었습니다.
바다 건너 서로 다른 땅에서, 보라는 비슷한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1856년, 영국에서 뜻밖의 일이 벌어집니다.
열여덟 살의 화학도 윌리엄 퍼킨은 말라리아 약인 키니네를 만들려고 실험을 하고 있었습니다.
약은 만들지 못했고, 플라스크 바닥에 검은 찌꺼기가 남았습니다.
그 찌꺼기를 씻어 내다가, 퍼킨은 그것이 천을 선명한 보라로 물들인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사람이 처음으로 화학으로 만들어 낸 염료였습니다.
퍼킨은 이 색에 '모브'라는 이름을 붙여 공장에서 만들어 팔았습니다.
고둥 만 마리가 하던 일을 이제 공장이 해냈습니다.
몇 해 지나지 않아 런던 거리에는 보라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넘쳐났습니다.
1862년 런던 만국박람회에는 빅토리아 여왕이 모브 빛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다고 전해집니다.

퍼킨의 발견은 보라 하나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 화학 염료가 잇달아 만들어지면서, 오랫동안 귀하던 색들이 하나둘 값싼 색이 되었습니다.
색이 신분을 말해 주던 시대가 저물기 시작한 것입니다.

1850년대 실험실에서 플라스크를 들여다보는 젊은 퍼킨

보라는 흔해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보라가 품은 '고귀함'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보라에서 품위와 신비를 떠올립니다.

이 이야기는 미국의 철학자 찰스 샌더스 퍼스의 생각으로 풀어 볼 수 있습니다.
퍼스는 기호를 세 가지로 나눴습니다.
생김새가 닮아서 뜻이 통하는 '도상', 실제로 이어져 있어서 뜻이 통하는 '지표', 사람들의 약속으로 뜻이 통하는 '상징'입니다.

연기를 보고 불을 아는 것은 지표입니다.
연기는 불이 있어야만 생기기 때문입니다.

옛날의 보라색 옷도 지표였습니다.
그 옷을 입었다는 것은 정말로 만 마리의 고둥을 살 만큼 부유하다는 뜻이었습니다.
색과 부 사이에 실제로 끈이 이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퍼킨의 염료는 그 끈을 끊었습니다.
이제 보라색 옷은 부유함을 증명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보라가 고귀하게 느껴지는 것은, 수천 년 동안 쌓인 약속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지표로 시작한 색이, 상징이 되어 살아남은 셈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보라는 고급스러움을 말하고 싶을 때 불려 나옵니다.
값비싼 화장품의 상자, 특별한 날의 초대장, 초콜릿 회사의 포장지에서 보라를 쉽게 만납니다.
고둥은 더 이상 필요 없지만, 고둥이 남긴 뜻은 여전히 쓰이고 있습니다.

문구점의 천 원짜리 보라색 볼펜에도, 아주 먼 바닷가 고둥의 이야기가 조금은 묻어 있습니다.
값은 떨어졌지만, 뜻은 아직 왕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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