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시작되고 불이 꺼지면, 깜깜한 객석 한쪽에 작은 초록 불빛 하나가 남습니다.
문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이 그려진 비상구 표지입니다.
평소에는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그림이 무슨 뜻인지 배운 적 없이도 압니다.
초록 바탕에 흰 사람, 그리고 열린 문.
위급할 때 저쪽으로 가라는 말입니다.
1970년대 초, 일본에서는 백화점 건물에 큰 불이 잇달아 나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1972년 오사카 센니치 백화점 건물 화재에서만 백 명이 넘게 숨졌습니다.
연기가 가득 찬 건물 안에서 사람들은 나가는 길을 찾지 못했습니다.
글자로 쓴 '비상구'는 연기 속에서 잘 읽히지 않았습니다.
글을 모르는 아이나 다른 나라 사람에게는 더 그랬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글자 없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표지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1979년, 디자이너 오타 유키오가 그린 '달리는 사람'이 뽑혔습니다.
이 그림은 1980년대에 국제 표준이 되었고, 지금은 세계 여러 나라의 건물 벽에 걸려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비상구 표지도 같은 그림입니다.
그림 속 사람은 문을 향해 막 뛰어나가는 순간의 모습입니다.
몸은 앞으로 기울어 있고, 팔과 다리는 크게 벌어져 있습니다.
가만히 서 있는 사람이 아니라 달리는 사람을 그려서, '지금 이쪽으로'라는 말까지 함께 담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초록이었을까요.
국제 표준은 안전에 쓰는 색에도 저마다 역할을 정해 두었습니다.
빨강은 금지와 소방 설비, 노랑은 경고, 파랑은 반드시 지켜야 할 지시, 그리고 초록은 안전과 대피입니다.
소화기와 소화전이 빨간 것도, 공사장 표지가 노란 것도 이 약속 때문입니다.
불이 났을 때 사람들이 찾아야 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불을 끌 도구, 그리고 빠져나갈 길.
하나는 빨강이 맡고, 다른 하나는 초록이 맡았습니다.
두 색이 섞이지 않아야 급할 때 헷갈리지 않습니다.
지난 4화의 신호등을 떠올려 보면 더 자연스럽습니다.
초록은 이미 '가도 된다'는 색이었습니다.
어두운 곳에서 사람의 눈이 초록 계열을 비교적 잘 느낀다는 점도 함께 이야기됩니다.
우리 주변에는 초록 십자도 많습니다.
공장이나 공사장에 걸린 안전 표지의 초록 십자는 '안전'을 뜻합니다.
초록은 그렇게 '여기는 안전하다', '이쪽으로 가면 산다'는 말을 맡게 되었습니다.
건물 안을 자세히 보면 초록 표지가 두 가지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문 위에 걸린 표지는 초록 바탕에 흰 그림입니다.
복도 벽 아래쪽에 붙은 표지는 거꾸로 흰 바탕에 초록 화살표입니다.
앞의 것은 '여기가 나가는 문'이라는 말이고, 뒤의 것은 '문은 이쪽'이라는 말입니다.
같은 두 색의 자리를 바꿔서 서로 다른 말을 하는 것, 4화에서 본 '차이'가 여기서도 쓰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약속이 모든 곳에서 같지는 않습니다.
미국의 많은 건물에서는 비상구 표지가 빨간 글씨의 ‘EXIT’입니다.
초록 비상구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빨강이 '들어가지 말라'는 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같은 문을 두고, 한쪽은 초록으로 말하고 다른 쪽은 빨강으로 말하는 셈입니다.
러시아 출신의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은 말이 전해지려면 몇 가지가 갖춰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말하는 사람, 듣는 사람, 전하려는 내용, 그리고 둘이 함께 알고 있는 규칙입니다.
야콥슨은 이 규칙을 '코드'라고 불렀습니다.
코드가 같으면 그림 하나, 색 하나로도 뜻이 통합니다.
코드가 다르면 똑같은 색도 엉뚱한 말로 읽힙니다.
빨간 EXIT 표지가 헷갈리는 것은 표지가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보는 사람의 코드가 달라서입니다.
국제 표준을 만든다는 것은 결국 코드를 맞추는 일입니다.
세계 어디서 불이 나더라도, 누구나 같은 그림과 같은 색을 보고 같은 쪽으로 달려갈 수 있도록.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지면 초록 표지는 다시 눈에 띄지 않습니다.
아무도 그 문으로 달려갈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 표지는 오늘도 같은 자리에서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